2019년 1월 21일 월요일

바나나몰 직원 P군의 일기 4. 쌀딩크 베트남 8강의 기적...

'쌀딩크' 박항서

사상 첫 8강에 열광하는 베트남 국민

'쌀딩크 매직'이 또 일어났다.
이 정도면 히딩크, 베니테즈 부럽지 않다.
베트남이 역사상 처음으로 아시안컵 8강에 진출했다.
베트남에 새로운 한류가 분다.
바로 박항서라는 쌀딩크를 타고...

베트남 축구팀을 이끌며
2018년 AFC U-23 선수권 준우승
2018년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 게임 4강을 이끌며
베트남에 쌀딩크 열풍을 만든 박항서가
이번엔 아시안컵 8강이라는 수확을 확보하면서
일대 영웅이 됐다.

여기서 잠깐 박항서라는 사람을 볼까?


이미 현역 시절부터 머리털이 없었다.
그래도 그에게 타고난 게 하나 있었으니 바로 재능.

중학교까지 축구는 취미로만 즐기던 그에게
고등학교 축구부의 공차는 모습은 열망을 끓게 했다.

박항서는 고등학교에 들어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축구를 하기 시작했다.

대단한 건
그렇게 고등학교 3학년이 됐을 무렵
그는 경신고 소속으로 전국 청룡기 축굳회에서 결승골을 넣으며
우승컵을 안겼다.

이후 한양대에 진학한 후 2학년이던 시절
1978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청소년 대표팀 주장을 맡아 우승을 경험했다.

이후 프로로 전향
1985년에는 소속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며
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됐고
1986년에는 팀의 주장이 됐다.

그러는 사이에 국가대표 시합도 뛰었다.
아쉽게도 대한민국 국가대표를 달고 시합에 나간 건
단 1번에 불과하지만
고등학교에 들어와 축구를 시작한 그가
이같은 축구 커리어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이후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는 수석코치로서
거스 히딩크 감독을 보좌했다.

히딩크가 거스 히딩크 매직으로
한국의 월드컵 4강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울 때
박항서도 큰 역할을 한 셈이다.

히딩크가 떠난 이후 박항서는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대표팀을 맡는다.
여기서 그에게 첫 번째 시련이 다가온다.

당시 하늘을 찌르던 대표팀의 사기를 등에 업고도
그것도 대한민국 안방에서 열린 대회임에도
결승 진출에 실패했따.

박지성, 이천수, 최태욱 등
월드컵 4강 황금 멤버들과 함께
이동국, 김은중, 김두현, 김동진 등이 합류했으며
이운재, 이영표 등 국가대표 핵심 멤버도 함께했다.

하지만, 준결승에서 이란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배했다.
박항서는 바로 경질됐다.


이후 박항서는 잠시 휴식기를 갖다가
K리그 경남FC 감독으로 부임해
나름대로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다들 유종의 미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는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맡은 베트남 취임 기자회견에서 그는 이런 말을 한다.
"내가 가진 축구 인생 모든 철학과 열정을 쏟겠다"

히딩크의 어퍼컷 세레모니

히딩크의 수코였던 쌀딩크의 세레모니

이제 베트남을 이끌고
스즈키컵 우승부터
아시안컵 8강 진출까지 엄청난 것을 이루고 있는 박항서...

그를 보면서 느끼는 게 하나 있다.
바로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거다.

2002년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서
결승 진출에 실패하고
전 국민에게
먹을 수 있는 욕은 모조리 오질나게 먹은 그는
벌어둔 돈으로 그냥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나이에도
끝까지 재기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현재 쌀딩크로 베트남의 영웅이 됐고
국내에서도 명장 중 한 명이라는 평을 받는다.

지금이 힘들고
지금이 괴롭고
지금 세상이 무너질 거 같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마라.

우린 아직 젋고
인생은 굉장히 길다.


베트남은 박항서를 위해
비행기 안에서 비키니 파티를 열어줄 정도다.

그는 베트남에서 한류 아이돌보다 인기가 좋다.
그로 인해 한국 문화에 대한 인식도 굉장히 좋아졌다고 한다.

베트남에선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굉장히 좋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 대한민국이 월남전 당시
강간, 학살 등에 연류됐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대한 사과나 보상은 전혀 없었고
아직도 그런 움직임은 없다.

박항서 하나로 이렇게나 바뀐다.
이게 문화의 힘이고 스포츠의 힘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